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단 편집) ==== 관동군 포로 ====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모든 일본군은 소련군에 항복하여 소련의 전후복구 과정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 수는 무려 60만여 명에 달했다. 시베리아에 끌려간 관동군의 처우가 어땠는지는 아직 객관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에 소일 협상을 통해 관동군 포로들이 일본으로 귀환했을 때의 증언만이 당시를 짐작하게 해 주는 증거 자료일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엇갈리는 상황이라 죽기 직전의 대우를 받았다고 증언하며 일본 극우쪽의 반공, 반소 선전에 동원되는 사람도 있었으며 [[http://tonaitoo.egloos.com/2110278|그럭저럭 버틸 만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보내진 곳이 어디냐에 따라 포로의 대우가 많이 달랐을 확률이 높다. 링크의 일본군은 소련군들과도 나쁘지 않게 지내다가 애까지 만들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렇게 포로를 10년간 잡아둔 이유는 포로를 박해하려는 [[사디즘]]적인 이유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소련의 엄청난 사망자 때문에 소련의 노동력이 부족한지라, 추축국 포로를 이용해 전후복구 사업 및 경제개발을 하기 위함이었다. [* 일본군뿐만 아니라 소련에 억류된 독일,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등 구 추축국 포로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후 복구가 마무리된 1955년에야 석방되었다. [[서독]]에서 가장 반공정서가 심한 집단이 이렇게 10년간 강제노역에 동원된 송환 포로 출신들이었다.] 그리하여 일본군 포로 중에서도 일부는 독소전쟁이 벌어졌던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까지 끌려가서 전후복구사업에 종사하기도 했고, 일부는 북극권의 건설현장이나 탄광으로 끌려가기도 했는데, 이렇게 북극이나 우크라이나의 환경이 극과 극이다 보니 포로 대우 역시 극과 극이었다.[* 일본의 대표적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는 스무 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혔는데, 그 때의 경험을 아들에게 들려주었고 이 내용을 오구마 에이지가 자신의 책인 <일본 양심의 탄생>(김범수 옮김, 동아시아 펴냄)에 실었다. 오구마 겐지는 소련군 포로 생활에 대해서 "소련군은 일본군보다 나았던 것 같다. 소련군은 임무를 벗어난 사적인 관계로 있을 때는 장교와 병사가 마음 편하게 서로 이야기했다. 메이데이 같은 휴일에는 수용소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함께 춤을 춘다거나 했다. 상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병사가 항변하는 것도 가능했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http://pressian.com/m/m_article/?no=245981#08gq|출처]]] 그래서 포로 생활 경험자들의 증언도 각자 다를 수 밖에 없다. 당장 타키가와 세이호우의 중편 우크라이나 혼성여단에서 중간 중간 나오는 일본인 정치운동 이야기가 바로 이런 고민을 잘 나타낸다. 작가조차도 이런 민주운동 관련 서술 때문에 항의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건 일본군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국군이나 유엔군 병사들의 처우에 대해서도 말이 서로 다른게 많다. 사실 일본군을 비롯한 구 추축군 포로 문제가 조명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원인은 추축국이 워낙 많은 악행을 저지른 지라 대부분의 피해국에서 추축국 시민들의 고통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소련이 구 추축국 포로들을 전후 10년이 지난 시점까지 수감한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자 전쟁범죄이다. 이러한 연유로 관동군 포로에 대한 소련의 처우 문제는 쿠릴 열도 문제와 더불어 현재 러일 관계의 걸림돌로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러시아 정부가 아직까지도 관동군 포로 문제에 대한 기밀 문서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김국후 교수가 <평양의 소련군정>을 쓸 때 당시 제25군 [[정치장교]]인 레베데프 소장과의 인터뷰에서 그 문제를 언급하자 레베데프는 손사레를 치고 "그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일."이라 말하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러시아는 관동군 및 구 추축군 포로 문제를 [[금기]]시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나 다른 연구자들의 기밀 해제 요청에 요지부동인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